연극열전 시리즈가 다시금 에쿠우스를 무대에 올렸다. 면면은 그 어느때보다도 화려하다. 역대 알런 출신의 조재현과 송승환이 다이사트역에 도전하고, 정태우와 류덕환이 알런을 연기한다. 다이사트와 알런의 더블캐스팅, 조재현의 연출, 여덟으로 늘어난 말, 구태여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화려하다. 티켓팅을 위해 찾은 예매사이트에서는 과연 매진에 가까운 판매율을 보이고 있었고 후기 및 기대평에도 에쿠우스 언급이 가장 많았다. 역시나, 과연.
나는 에쿠우스에 대해 어떠한 일말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에쿠우스는 나를 구한 희곡이고 나의 처음이자 나의 마지막일 희곡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연극열전 소식에도 앞뒤 생각 없이 바로 티켓을 '질렀다'. 거의 절반은 의무감이기도 했다.
사실 불안한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조재현의 알런 역시 내 맘에 썩 들지 않았던 탓일까. 연출이 조재현이고 다이사트가 조재현이라는 이야기에-배우 조재현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에쿠우스를 좋아하는 조재현이 보여줄 세계에 기대가 되기보다 먼저 걱정이 되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 걱정과 불안을 오늘 확인하고 왔다. 송승환/류덕환 캐스팅의 8시 공연.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2005년 이후이니 햇수로 5년만이다-에쿠우스 때문에 설레이고 두근거리고 또 불안했다. 남명렬 김영민의 에쿠우스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과연 송승환 류덕환이 내게 보여줄 에쿠우스의 세계가 어떨지 몹시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한번 맛있는 것을 먹고 나면 어지간히 맛있는 것은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법이니까.
비교의 대상이 남명렬이었던 것이 나빴을까. 시작부터 송승환의 다이사트는 나를 김빠지게 했다. 시종일관 밋밋하고 뻣뻣하며 생기없는 다이사트는 알런을 전혀 압도하지 못했고, 초반과 후반의 수직적 관계가 도치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다이사트는 늙고 피곤한 노새처럼 앵앵댔고 알런은 왕따당하는 초등학생처럼 웅얼댔다. (심지어 송승환은 무려 세번이나 대사를 씹었다.) 조연들은 장치처럼 움직였고 알런의 아버지는 무대 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개그맨이 되었다. '보다 대중적으로 다가서기 위해' 집어넣고 살리고 부풀린 코믹한 요소들과 개그는 관객들이 알런의 독백을 부지런히 쫓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 오오, 말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도구화되고 배경화된 말들이었다. 여덟마리로 늘어났으나 그저 여덟마리의 병풍이 되어버린 말들은, 에쿠우스의 본질 자체를 석화시키고 윤색시켰다. 너제트는 여전히 강인하고 절대적인 에쿠우스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초라해졌고,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에쿠우스를 향해 절규하던, 알런의 외침조차 공허한 메아리로 만들어버린 말의 부재. 그것이 이번 에쿠우스의 가장 큰 실수이자 안타까움이었다. 산산이 부서져 붕괴되어 정화된 알런, 알런을 무너뜨려 정상적인 길로 돌려세우며 존재론적으로 자살하는 다이사트, 모든 것을 관조하는 질투심 많은 신 에쿠우스.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존재감이 없이 유야무야해진 2010 연극열전 3 에쿠우스에는 주인공이 없었다.
물론, 좋았던 것도 있었다. 사실 알런 역의 류덕환에게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는데 생각외로 몰입해서 노력하는 알런을 볼 수 있었다. 음향에 묻혀 절절해야 할 너제트 위에서의 절규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등, 발성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컸지만 알런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알런에 몰입해서 펼치는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천하무적 마돈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림자 살인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몸이 알런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류덕환에게서 아주 커다란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리뷰를 굳이 해야하는 가에 대한 소소한 회의가 든다.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기에 안좋은 소리가 많이 나왔다. 무대 위에 객석을 배치한 연출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전반적으로 늘어지는 극의 진행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러나 이렇게 쓴 소리가 술술 나오는 것도 결국은 내가 이 연극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나니, 갑자기 모든 것이 쑥쓰러워지는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투덜대는 것이 연인의 단점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과 같이 느껴져 나는 지금 몹시, 쑥쓰러워졌다. 차마 내가 쓴 위의 투덜거림을 다시 읽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기에 객관적인 척 하는 리뷰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학교 1학년,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이 몰려있는 서가 뒤쪽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케케묵은 세로쓰기 책들이 폐기도서로 분류되어 꽂혀 있던 그 서가 밑에 앉아 손에 닿는 대로 책을 뽑아보는 것이 즐겁던 시절, 나는 내 인생의 첫 희곡을 만났다. 에쿠우스, U가 연달아 두번이나 들어가는 독특한 이름의 희곡. 첫장을 펼치던 순간부터, 세로로 나뉘어진 2단의 대사들 속에서 정신없이 헤엄치던 순간부터 나는 희미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인생을 지배할 책 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과연, 내 인생의 첫 희곡이 에쿠우스였듯 내 인생의 첫 연극은 에쿠우스가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마지막 연극도 에쿠우스가 되기를 아직까지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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